며칠 전 캐나다에서 총선거가 있었고, 예상대로 10년 동안의 보수당의 집권이 끝나고 자유당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저는 캐나다 시민권자가 아닌 관계로 투표권이 없었지만 이 총선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그 이유는 정권이 바뀌면서 캐나다 이민법 역시 앞으로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미국과는 다르게 캐나다는 이민법이 꽤 자주 바뀝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유학생이나 취업비자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뀐 이민법 때문에 여러가지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그 덕분에 한달동안 홈리스로 지낸 상황이 생겼었는데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한번 해 볼까 합니다.








Hi Alex,

Vancouver's Head of Department has had a chance to review your work and work like to move forward with setting up a chat!

I have cc'd in my colleague Ellen who will be able to take care of the details.

Talk soon,
Christina


작년 5월LA에서 일을 하던 중 갑작스럽게 밴쿠버의 MPC라는 VFX 회사가 제게 관심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사실 MPC에 지원한지는 반년도 훨씬 지난지라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았었고, 당시 LA지역은 VFX 회사들이 거의 떠나가고 껍데기만 남은 상황이어서 밴쿠버 지역으로 이주를 계속 추진하고 있던 중이라 그 연락이 매우 반가웠습니다. (비록 이 회사가 저임금에 평판이 그다지 좋지 않은 회사이긴 하지만요.) 15분 정도 스카이프 인터뷰를 봤는데, 한 시간 후에 오퍼를 주겠다는 이메일을 보내더군요. 연봉이 예상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지만 일단 밴쿠버로 들어가는 것이 당시 목표였기에 오퍼를 고맙게 받아들이고 캐나다로 가기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예상 출근 날짜는 8월 초로 꽤 여유있는 일정이었죠. 당시에는.


다니고 있던 직장에 2주 노티스를 주고, 버릴 것, 팔 것, 가져갈 것을 분류하는 등 가재도구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회사에서 요구하는 비자 관련 서류도 준비해서 보냈습니다. 그 때가 6월 초였는데, 담당자 말로는 넉넉히 잡아 3주 정도면 비자 (정확히는 LMO - 당시 기준)가 발급 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 다음 주, 살던 아파트에는 8월 초에 나가겠다고 통보를 하고, 회사에 재차 확인을 했습니다. 이사 준비 잘 하라고 합니다. 가구들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6월 말, 갑자기 캐나다 이민법이 바뀌었습니다. 이전까지의 캐나다 직업분류표(NOC)에 근거한 노동승인서(LMO, Labour Market Opinion) 발급을 중단하고, 이제부터는 임금 수준에 따라서 발급 여부를 결정하고, 명칭도 LMIA(Labour Market Impact Assessment)로 바꾼다고 합니다. 이 서류가 있어야 입국할 때 취업비자를 발급 받을 수가 있는데, 취지는 이 서류를 편법으로 발급받는 경우가 많고, 캐나다인 대신 저임금 외국인 노동자를 뽑기 위해 남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의 발급을 기존보다 훨씬 까다롭게 심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 담당자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제 서류는 이미 접수되어 심사 중에 있기 때문에 이번 이민법 변경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합니다. 컴퓨터와 티비를 팔았습니다. 이제 남은건 자동차와 밴쿠버로 가져갈 것들 뿐입니다. 7월 중순이 지났는데도 제 LMO는 아직 무소식이길래 회사에 다시 연락했습니다. 이민법 변경 때문에 심사가 조금 늦어지긴 하는데 제 출근 날짜 이전에 나올 것은 확실하므로 원래 계획대로 이사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합니다. 지인들을 만나 환송회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동차를 팔았습니다. 


7월 31일, 회사로부터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제 비자가 예상보다 늦어져서 출근날짜를 미루어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언제 비자가 나올지는 이제 자기들도 모르겠다고 하고, 비자가 나오면 즉시 제게 알려주겠답니다. 눈앞이 깜깜해 졌습니다.




아파트 리징오피스를 찾아갔습니다. 한 달 정도 이사 날짜를 연기할 수 있는지 물어봤는데 이미 다음 입주자가 정해졌다고 합니다. 원래 이야기한 move out 날짜에서 하루도 연기해 줄 수 없어 미안한데, 대신 그 다음 날 오전 8시 이전까지만 열쇠를 반납해도 된다고 합니다. 아파트에서 하루는 더 머무를 수 있어 기뻤습니다. 짐을 빼야 하는데 갈 곳이 없습니다. LA에 살고 있는데 자동차도 이젠 없습니다. 단기 숙소를 알아봤지만 가격이 예상보다 훨씬 비쌉니다. 


"여행이나 다니자."


몇가지 옵션을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차피 숙소나 호텔에서 머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비자 나오길 기다리는데 쓰는 돈이나, 기다리는 동안 남는 건 시간인데, 그간 차곡차곡 모아둔 항공, 호텔 마일리지로 여행 다니면서 쓰는 돈이나 비슷할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단지 그 여행을 얼마나 즐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겠지만요. 캐나다로 가져갈 집안 살림은 일단 스토리지를 빌려 쌓아놓습니다. 얌체스럽지만 Public Storage에서는 첫달 사용료 1불! 한달만 쓰고 빼도 됩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첫 목적지는 하와이로 정했습니다. 마일리지로 비행기표를 끊었고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잡았습니다. 한 일주일만 기다리면 비자 나오겠지? 허리케인 두개가 몇 십년 만에 며칠 사이로 하와이를 강타한다고 합니다. 덕분에 여행객이 줄어들어 150불로 일주일치 렌트카를 빌립니다. 


다이아몬드 헤드에 올라가서 와이키키 해변을 바라봅니다. 거리 곳곳에 커플룩을 한 한국 신혼부부들이 돌아다닙니다. 하나우마 베이에서 매일같이 스노클링을 했습니다. 무수비도 먹고 일본식 우동과 돈까스도 먹었습니다. 거리 곳곳에 일본인들과 일본어, 일본음식이 즐비합니다. 하와이는 완전 일본입니다. 두번째 허리케인은 다행히 비켜갔습니다. 하와이에서의 열흘이 끝나갑니다. 아직 비자 소식이 없습니다. 


하나우마 베이 전경





두번째 목적지는 샌프란시스코, 친구네 게스트룸에서 머물기로 합니다. 며칠만 머무르다 보면 비자가 나올거야 기대하고, LA에서 메가버스 이층 맨 앞자리에 타고 샌프란으로 올라갑니다. 숙박비가 안들어 고맙기 그지 없습니다. 고마워서 밥도 사고 생필품도 사다 채워 놓았습니다. 



고향 같은 샌프란시스코, 당분간 또 못올 것 같아 여기저기 돌아다녀봅니다. AT&T 파크에 가서 자이언츠 야구도 (공짜로) 보고, Uber에 회원가입하면 30불 크레딧을 준다길래 공짜로 첫 라이드도 해봤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참으로 진보적인 도시입니다. 며칠만 머물면 비자가 나올줄 알았는데 또 일주일이 지나갑니다. 설상가상, 다음 주에는 시부모님이 방문하신다고 합니다. 게스트룸을 빼줘야겠습니다. 미안해서 더 머무를 수도 없군요. 집안 살림을 팔아서 만든, 캐나다 정착금인 통장 잔고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젠 좀 저렴한 동네로 가야겠네요. 



비행기를 타고 덴버로 갔습니다. Pikes Peak에 올라갔습니다. 수목 한계선이 저 아래다 보니까 주변 풍경이 비현실적입니다. 아닌가? 산소가 부족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머리가 어질어질 하니 해발 고도가 4천300미터입니다.

Pikes Peak 를 오가는 트램입니다.


기왕 돌아다니는 김에 예전에 못가본 아치스 국립공원으로 차를 돌립니다. 이야 이렇게 멋진 곳이었군요. 구경하다보니 비자 기다리며 전전긍긍하던 형편을 까맣게 잊어 먹었습니다. 그런데 델리케이트 아치를 향해 걸어 올라가는데 왜이렇게 힘들죠? 옆에 지나가던 사람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괜찮은지 물어봅니다. 저질체력이어서 그런건데 좀 민망합니다. 여기도 고산지대인가? 왜이렇게 산소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와이프는 아직 생생하길래 얼른 가서 석양 빛에 비치는 아치를 찍으라고 보냅니다. 한템포 쉬고 좀비처럼 기어 올라가는 중, 저 멀리 "우와아아아아" 하고 사람들이 탄성을 지릅니다. 올라가는 내내 구름에 햇빛이 가렸는데 딱 아치에 도착할 때 쯤 해가 나옵니다. 저는 날씨의 신입니다. 어딜 여행하던 제가 가기만 하면 날씨가 도와줍니다. 하와이에서 두번째 허리케인이 비켜갔다고 했죠? 정말로 믿을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비자 문제는 왜 이렇게 운이 안따라 주나요.  




다시 덴버로 돌아옵니다. 이번에는 록키산 국립공원으로 향합니다. 미국 록키는 캐나다 록키에 비해서 별 볼일 없네요. 구불구불 국립공원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있습니다. 드라이브 하기에는 좋군요. 덴버에서의 일정도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마일리지도 이제 다 써갑니다. 아리조나? 포틀랜드? 와이오밍? 다음엔 어디로 갈까 슬슬 고민해야 합니다. 아니, 이제는 과연 이 잡오퍼가 캔슬되지는 않을런지 걱정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비자 문제로 취업이 취소되는 경우가 왕왕 있거든요. 미국 생활을 정리했는데 캐나다로 못가게 되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러면 최악인데 말이죠. 졸지에 "Homeless" 생활을 한지 한달이 다되어 가고 있습니다. 


Bear Lake란 곳을 향했습니다. 비가 후두둑 떨어지던 중이었는데 날씨의 신이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햇빛이 비춥니다.  호수를 한바퀴 돌기로 합니다. 고즈넉하니 참 예쁘네요. 저 멀리 무지개까지 떴습니다.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려나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Bear Lake에 뜬 무지개




날이 저물고 호텔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길가에서 무쓰 둘이서 싸우고 있네요. 차들을 도로에 방치하고 사람들이 구경하느라 정신없습니다. 화장실이 급하다는 와이프의 말에 얼른 공원 입구 여행자 안내소로 운전해 갑니다. 저는 차 안에서 내일 할 일에 대해서 연구중입니다. 아이폰이 진동하길래 집어들었습니다. 











아, 비자 서류가 발급되었다는 메일이 왔습니다!

드디어. 홈리스 생활이. 끝이 났습니다.




그 날이 수요일 저녁이었는데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라고 합니다. 마음같아서는 내일부터 출근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일단 LA로 가서 짐을 챙겨야지요. 토요일에 돌아가기로 합니다. 마지막 남은 마일리지를 털었습니다. 길고 긴 홈리스 생활이 끝이 났습니다. 록키 마운틴에서 무지개를 보고 나니, 꼬였던 실타래가 한 순간에 풀렸습니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잊지 않겠다, 캐나다 이민법.





나중에 알아 보니, 제 서류는 접수되고 난 후 이민법이 바뀌고 나서, 새로운 신청서와 심사비 1000불을 내고 다시 접수하라는 메모와 함께 되돌려 보내졌다고 합니다. 저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회사에 오퍼를 받은 후배가 있었는데, 저보다 보름 일찍 출근하기로 되어 있었던 친구였습니다. 보름 차이로 접수한 그 친구의 비자 서류는  원래 일정대로 발급 되었더군요. 그 친구가 비자 발급받고 며칠 후에 이민법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비자 관련해서는 정말로 운이 없군요.




서두에 말했듯이 미국과 다르게 캐나다는 이민법이 자주 바뀝니다. 그런데 캐나다는 바뀐 이민법 이전에 접수한 서류들을 제대로 심사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걸 새로운 법에 기준하여 심사를 하겠다는 뭔가 비상식적인 경우인데요, 제 경우가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였고, 작년 가을에도 이런 일이 또 생겼습니다. 올해 초 Express Entry라는 새로운 이민 심사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는데, 작년 가을에 기존 이민법 방식으로 신청했던 서류들이 대거 반송되는 사태가 있었거든요. 표면적으로는 기존 이민 시스템의 쿼터가 다 차서 새 Express Entry를 이용해서 접수하라는 이유로 되돌려 보낸거라는데,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사람들은 별로 없어보입니다. 이처럼 캐나다 이민법이 바뀌는 그 중간에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생겨서 신청자들이 고스란히 그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이 발생합니다. 


새 캐나다 정부가 내세운 공약에 의하면 분명 몇가지 이민법들이 변경될 예정입니다. 그 시기가 언제일지는 아직은 모르고, 비록 자유당 정권의 이민법에 대한 방향은 이민 개방이라는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긴 하지만, 분명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받는 경우도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지금 캐나다 영주권, 취업비자, 워킹홀리데이 등 자격이 되시는 분들은 미리 준비하셔서, 저같이 의도치 않게 불이익을 당하는 사태가 안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그 한달 동안의 여행이 저희 인생의 큰 위기이자 추억으로 남았고,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 기회가 아니었다면 하와이 여행은 아직도 못 갔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치스 국립공원과 록키마운틴은 생각도 못했겠지요. 그런데 와이키키에서 먹었던 그 무수비와 우동 맛은 잊혀지지 않아 또 한번 하와이를 가야 할텐데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네요. 이제는 마일리지도 없어서 고스란히 제 지갑을 털어서 다녀와야 할테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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